함열남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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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종파 소개
참조도(參照圖)
현조(顯祖)와 파조(派祖)
현조(顯祖) 부제학공 휘(諱) 찬(璨)

公은 세보상(世譜上) 16世이시며 字는 숙헌(叔獻) 호는 호은(壺隱) 또는 창랑(滄浪)이시다. 선고(先考)이신 참판공 諱 순(順)과 선비 철원 최씨(鐵原 崔氏)의 독자(獨子)이시며 유복자(遺 腹子)로 1453年 음력(陰歷) 9월 27日에 출생(出生)하셨다.
公은 1477年(조선 성종8년) 춘당시(春塘試)에 응시(應試)하여 장원(壯元)으로 합격(合格)하시 고 1489年에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장예원 권지사평(掌隸院 權知事評), 예문관 사관 (藝文館 史官), 홍문관(弘文館),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등의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시 며 특히 사관(史官)에 임명(任命)되시어 기사관(記事官)으로 대전(大殿)에서 근무(勤務)하였다. 예리(銳利)한 판단(判斷)과 정의감(正義感)으로 이 주(李 胄)와 함께 쟁쟁한 권력가(權力家)인 영의정(領議政) 노 사신(盧 思愼), 윤 필상(尹 弼商), 임 사홍(任 士洪) 등을 상대로 탄핵(彈核)함 을 주저(躊躇)하지 않고 예리(銳利)한 필치(筆致)로 王에게 간언(諫言)하여 국사(國事)를 바로 하는데 크게 기여(奇與)하셨다.

그 後로 경상도(慶尙道) 암행어사(暗行御使)로 나가 양산군(梁山郡)의 부정사실(不正事實)을 적발(摘發)하여 척결(剔抉)하기도 하였다 또한 시독관(侍讀官) 시강관(侍講官)으로 문명을 날려 국조보감(國朝 寶鑑)에까지 오르고 승문원보감(承文院寶鑑)으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編纂)에 참여(參 與)하기도 하였고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제주목사(濟州道안무사지監,牧使), 예조참의 (禮曺參議), 이조참판(吏曺參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歷任)하셨으나 1504년 (燕山君 10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효수된 김굉필 등 신진사류를 신구하는 상소(上訴)를 올 리고 소신(所信)을 굽히지 않자 간신(奸臣)들의 중상(重傷)과 연산군(燕山君)의 미움을 받아 장(杖) 100대에 처하고 전라도(全羅道) 용안(龍安)으로 유배(流配)되시니 형(刑)의 여독(餘毒) 으로 곧 별세(別世)하시나 장례(葬禮)도 예(禮)를 갖출 수 없었고 묘(墓)도 제대로 없었다. 다만 창공(蒼空)에서 지키고 계실 뿐 다른 자손(子孫)들은 성묘(省墓)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燕山 12年(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中宗이 즉위(卽位)하자 동년(同年) 11月 11日 임 금이 전교(殿敎)를 내려 관원을 보내어 고향(古鄕)으로 이장(移葬)하고 수복관작(首復官爵)되 어 이조판서(吏曺判書) 兼 지경연의금부 춘추관 자헌대부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증직(贈職)되셨다. 배위(配位)는 貞夫人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시나 무 사(無嗣 : 후손이 없음)하시고 계배위(繼配位)이신 貞夫人 평산 신씨(平山 申氏)는 신 자승(申 自繩)의 女息으로서 슬하(膝下)에 4男 2女를 두시니 장남은 諱 필(弼)로 고창공(高敞公)파조, 2 男은 諱 익(翼)으로 현령공(縣令公)파조, 3男은 諱 숙(淑)으로 판윤공(判尹公)파조, 4男은 諱 설 (說)로 습독공(習讀公)파조 등 4파조(派祖)로 모셨으며 2女 中 長女는 전주인(全州人)으로 양 녕대군(陽寧大君)의 후손(後孫) 中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지낸 諱 린이요, 次女는 한양인(漢陽 人) 조 광준(趙 光俊)이다. 이어 손대(孫代)에는 8종형제(從兄弟) 6종자매(從姉妹)를 두게 되었 으나 불행(不幸)하게도 종손(宗孫) 정자공(正字公) 諱 효(孝)가 무후(無後)하므로 7종형제(從兄 弟)로 7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代를 이어 자손(子孫)들이 번성(繁盛)하여 가문(家門)이 상승(上昇)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높고 맑은 기상(氣象)은 청족(淸族)이라 자칭(自稱)하는 남궁(南宮)씨의 정신(精神)이 되었 으며 이를 만세(萬世)에 기리기 위해 묘전(墓前)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고 영모재(永慕齋) 를 세워 음력(陰歷) 3월 14일에는 온 후손(後孫)들이 모여 정성(精誠)껏 시향(時享)을 지낸다. 墓는 전북 익산시 성당면 갈산리 산66번지에 신좌(申座)로 모시었다. 묘전(墓前)의 등석(燈石) 과 문관석(文官石)은 유명(有名)하다. 문관석(文官石)의 인상(人相)은 中國의 것을 닮은 듯 하 며 많은 전설(傳說)을 담고 있어 우리 나라에는 유례(唯例)가 없는 유일(唯一)한 것으로 전라 북도에서 1999年 11月 19日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로 지정(指定)하여 보호(保 護)하고 있다.

아래에 그림으로 소개(紹介)하는 두 片의 시(詩) 題 묵죽(墨竹)과 題 묵매(墨梅)는 公이 유배(流 配)길에서 지으신 한(恨) 많은 詩이다. 이외에도 많은 詩와 글씨가 있으나 傳하여 지는 것은 別 로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公이 기사관(記史官)으로 재임(在任)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漢)나라 선제(宣帝)를 말씀 드린다면 그는 명성(名聲)은 있으나 실상(實狀)인즉 그것은 상 반(相反) 되는 것입니다. 그 아는 바를 必히 말씀 드린다면 그 공(功)은 중흥(中興)의 제왕(帝 王) 이라 할 것이나 그 실정(失政)을 말한다면 화(禍)를 면(免)하기 어려운 임금입니다. 당(唐)나라 선종(宣宗)은 지나치게 명찰(明察)하여 쇠(衰)하매 떨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인군(人君)이 스스로 명찰(明察)하다 보면 중신(重臣)들의 할 일까지 간섭(干涉)하게 되니 신 하(臣下)들은 자기의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 할 것이니 만사(萬事)가 어그러지게 되는바 지나 치게 명찰(明察)하지 않음이 인군(人君)으로서의 미덕(美德)입니다." 이 말씀은 국조보감(國朝 寶鑑)에 등재(登載)된 公의 명언(名言)의 한 구절(句節)이다. (國朝寶鑑은 중신(重臣), 문신(文 臣), 학자(學者)들의 명언(名言)을 구별(區別)하여 기록(記錄)한 책(冊)으로 제왕(帝王)들이 늘 탐독(耽讀)하며 참고(參考)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연산(燕山) 3年 12月7日에는 문신(文臣)들에게 보인 정시(庭試)에서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참여(參與)한 공(公)이 장원(壯元)을 하니 王은 상(賞)으로 한 계급(階給) 특진(特進)의 영광(榮光)을 주시었고 또 동년(同年) 12월21일에는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編纂)을 하는 실 무청(實務廳) 편수관(編修官)인 公에게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기도 했다. 또 成宗 20年 섣달 그믐날 2品 이상(以上)의 재상(宰相)과 장수(將帥), 승지(承旨), 주서(주서), 사관(사관)을 입시 (入侍)케 한 後 王께서는 "저무는 기유년(己酉年) 하루를 유쾌(愉快)하게 보내고자 하니 경(卿) 들은 내일을 위하여 마음껏 즐기기를 바라노라." 하시고 여러 가지 상품(賞品)을 준비(準備)하 시어 즉흥(卽興)으로 詩를 지어 올리게 하매 올 래(來)字를 운(韻)으로 내놓았다. 王께서 직접 (直接) 검시(檢詩 : 詩를 검사하는)하시니 검열(檢閱)인 公의 詩를 읽고 '옥백지구(玉白之鷗)'라 고 극찬하시며 옥잔(玉盞)에 어주(御酒 : 임금이 주는 술)를 가득 부어 상주(賞酒)로 내리셨다. 이일을 기억(記憶)해 두었던 성종(成宗)은 승하(昇遐)하기 직전(直前)에 고명(顧命)으로 公을 사간원 헌납(司諫원 獻納)으로 승진(昇進) 시키신바 있는데 그 詩가 "구역회동래(九譯會同來)"였다.

정부인 평산 신씨

현조(顯祖)이신 부제학공의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이시다. 할머니께서는 고려 개국공신(高麗 開國功臣)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16代 孫인 대사성(大司成) 신 자승(申 自繩)과 의령인(宜領人) 남(南)씨 부인(夫人)의 따님으로 1457年2月27日 出生하셨다.
조부(祖父)는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평산부원군 시호(諡號)가 문희공(文僖公)이신 諱 개이고 외조부는 영의정 선산인(宣山人) 남 훈이시니 명문(名門) 중의 명문가(名門家)에서 태어나신 규수(閨秀)이시다. 부제학공 할아버지의 초배위(初配位)이신 안동 김씨가 자녀를 두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시니 계배(繼配)로 남궁(南宮) 가문(家門)과 인연(因緣)을 맺게 되셨다.

할머니는 천품(天品)이 고결(高潔)하고 인자(仁慈)하시어 외로운 집안으로 시집오시어 가문(家문)을 크게 일으키시었으니 남궁씨가 중흥(中興)하는 역사(歷史)를 이룩하신 위대한 할머니로써 오늘까지 모든 자손(子孫)들에게 존경(尊敬)과 사랑을 받고 계신다. 슬하(膝下)에는 4男2女를 두시고 子女 양육(養育)에 엄격(嚴格)하여 혼신(魂神)의 情을 바치시니 자손(子孫)이 모두 대성(大成)하게 되었고 손대(孫代)에서는 8男 6女를 두게 되었다.후손(後孫)들은 네 아드님을 세보상(世譜上) 4파조(派祖)로 모시고 더욱 자손이 번성하니 증손대(曾孫代)에 8종형제(從兄弟)로 다시 8派를 나누었으나 안타깝게도 종손(宗孫)인 정자공 효(孝)의 代가 끊어지므로 현재의 7派를 이루게 되었다.다시 아랫대에서는 22편으로 나뉘었다. 할아버지께서 전북용안으로 유배(流配)된 後 곧 사별(死別)하게 되시고 서울에서 외롭게 사시면서 가문(家門)을 지키시다 향년(享年) 74世로 1531년 12월12일 타계(他界)하시니 도봉산 산84번지 유좌(酉座)에 모시고 할머니를 爲하여 만세재(萬世齎)를 짓고 해마다 정성(精誠)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음력 10월 16일)

고창공 휘 필(弼)

公은 세보상(世譜上) 17世이며 부제학공 휘 찬(璨)의 長男으로 1475년 전북 익산 용안에서 출생(出生)하시었다. 엄친(嚴親)의 엄격(嚴格)한 가도(家道)아래 학문(學文)에 정진(精進)하여 일찌기 진사(進士)가 되셨으나 부친(父親)이 유배(流配)를 당(當)하시자 벼슬을 버리고 父親의 유배(流配)길을 따라가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다가 선친(先親)이 별세(別世)하시니 애통비감(哀痛悲感)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고(先考)의 묘역(墓域)을 지키며 孝를 다하고,‘너희는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고 하신 선친(先親) 유지(遺志)를 받들어 오로지 예학(禮學)에만 뜻을 두시어 스스로 산수주인(山水主人)이라 자칭(自稱)하면서 조용한 선비의 삶을 사셨다. 後 에는 조정(朝政)으로부터 고창현감(高敞縣監)을 제수 받았으나 선친(先親)의 유훈(遺훈)을 받들어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셨다.
저서(著書)로는 오랫동안 연구하여 "가숙제의도(家塾祭儀圖)"를 저술하였다. 선비는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 申氏)이시고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강화 최씨(江華 崔氏)와 숙인(淑人) 경주 최씨(慶州 崔氏)를 맞으시니 諱 효(孝)와 諱 후(厚)의 2男과 4女를 두셨으나 장남 孝는 손대(孫代)에 무후(無後)하였다. 4女는 윤 적(尹 迪), 손 희효(孫 希孝), 성 대지(成 大智), 최 흥문(崔 弘文)이며 4파중에서 고창공파조(高敞公派祖)이기도하다. 墓는 전북 익산시 성당면 갈산리 목사동 산 66번지 신좌(申座 : 부제학공묘 뒤쪽)에 모시었다.

참봉공 휘 후(厚)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로 고창현감 휘 필(弼)의 차자(次子)이시나 장손(長孫)대에 이르러 무후(無後)하므로서 남궁씨(南宮氏) 종손(宗孫)의 길을 걸어왔으며 참봉공파(參奉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신다.
일찍이 학문(學文)을 익혀 벼슬이 진사(進士), 참봉(參奉)에 오르셨다. 배위(配位)는 공인(恭人) 전의 이씨(全義 李氏)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이신 이한원(李翰元)의 여식(女息)을 맞아 諱 저(著), 諱 지(芷), 諱 무(茂), 諱 장(藏)의 4男을 두셨으나 4男 諱 장(藏)은 무후(無後)하고 위로 삼형제(三兄弟)는 각각 甲編, 乙編, 丙編의 編祖로 모시게 되었다. 墓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2 만세동 선영하(先塋下)에 모셔 저 있다.

현령공 휘 익(翼)

公은 세보상(世譜上) 17世로 부제학공(副提學公) 휘 찬(璨)공과 평산 신씨(平山 申氏)의 次男으로 1480年에 출생(出生)하셧다. 字는 익지(翼之)이며
관직(官職)에는 40歲가 넘어서 음보(蔭補)로 한성부 랑관(漢城府 郞官)으로 입사(入仕)하시어 中宗 39 年 4月에 수원부 수운판관(水原府 水運判官)을 역임(歷任)하시고, 중종 원년(明宗 元年)에는 동복현감(同福縣監)을 보직(補職)받으셨다. 그로부터 3年 뒤인 明宗3年에 임피현령(臨陂縣令)에 오르시고 아버지 휘 찬(璨)공이 수복 관작(收復 官爵)할 때 증직(贈職)으로 이조참판(吏曺參判)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제수 받으셨다. 배위(配位) 貞夫人 연안 김씨(延安 金氏) 사이에 3男 2女를 두시니 3男은 諱 희(憘), 諱 침, 諱 기로 각각 3派의 파조(派祖)로 모신다. 2女는 별좌(別坐) 박 경원(朴 敬元) 군수(君守) 민 홍준(閔 弘俊)이다. 公은 4派 中에서는 두번째로 현령공파(縣令公派)의 파조(派祖)이기도 하다. 墓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2 만세동 선영하(先塋下)에 모셔 저 있다.

교리공 휘 희(禧)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휘 익(翼)공과 선비 貞夫人 연안 김씨(延安 金氏)의 長男으로 1510년에 出生하셨다. 字는 구중(懼中)이시다. 명종조(明宗朝)에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 호조정랑(戶曺正郞), 사첨시정(司瞻시正),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등 요직(要職)을 거치시고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으로 명종실록 편찬(明宗實錄 編纂)에 참여(參與)하기도 하셨으며 높은 학문과 덕망으로 노년에는 한림학사로 추앙받았으며 1597.9.27 87歲로 서거(逝去)하시고 후손(後孫)들은 이 어른을 교리공파(校理公派)의 파조(派祖)로 모신다

배위(配位) 淑夫人 초계 정씨(草溪 鄭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諱 활(活)만을 두시었는데 이 분이 청풍군수(청豊郡守)를 지내셨으므로 청풍공(淸豊公)이라고 부르며 슬하(膝下)에는 숙인(淑人) 광주 이씨(廣州 李氏)와의 사이에 5男을 두어 다른 派와는 달리 20世에 부터 각각 甲, 乙, 병, 丁, 戊編의 편조(編祖)로 모시며 아울러 公을 7派 中 교리공파(校理公派)의 파조(派祖)로 모시고 있다. 墓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2 만세동 선영하(先塋下)에 모셔 저 있다.

대사성공 휘 침(枕)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현령공(縣令公) 諱 익(翼)공의 2男으로 1513年 출생하셧다. 字는 성중(誠仲)이시고 1537年에 생원 1540년에 (중종 35년) 대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서 여러 요직을 맡아 공정 무사하게 정사를 다루시었으며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동지 중추부사(同知 中樞副事), 진위사,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館)을 중임(重任)한 後 형조참판(刑曺參判)에까지 오르시고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 現 서울시장), 외직(外職)으로 전라도 함경도 관찰사와(全羅道 咸鏡道 觀察使) 개성유수(開城留守) 等을 거치셨다.

그리고 강원도(江原道)와 경상도(慶尙道) 암행어사(暗行御史)로 지방행정(地方行政)을 감찰(監察)하여 바로잡았다. 特히 전라도 감찰사(全羅道 監察使) 재임시(在任時)에는 관내(管內)에 바치는 조세(租稅)를 백성(百姓)들이 군 소재지(郡 所在地)까지 가져 오려면 고생(고생)이 심할 것을 감안(勘案)하여 面에 창고(倉庫)를 짓고 그곳에 수납(收納)하도록 해 백성(百姓)들의 편의(便宜)를 도모(圖謀)하는 민생 중심(民生 中心)의 행정(行政)을 펴시었다.

이를 보은(報恩)하는 백성들의 징표(徵表)로 전남 곡성군 죽곡면 당동리에는 公의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거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 재임시(在任時)에는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기도 했다. 子孫들은 公을 7派 中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의 파조(派祖)로 모시며 배위(配位) 양천 허씨(陽川 許氏)로부터 5男을 두시니 長男 諱 길, 2男 諱 현, 3男 諱 식, 4男 諱 건, 5男 諱 영으로 5編을 이루어 각각 甲編, 乙編, 丙編, 丁編, 戊編의 編祖로 모신다. 1女로는 유 지회(兪 志會)를 두셨다. 墓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2 만세동 선영하(先塋下)에 모셔 저 있다.

지평공 휘 기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현령공 휘 익(翼)공의 3男으로 1517年에 출생(出生)하셨다. 자는 낙중(樂仲)이시고 진사(進士)에 올라 지평현감(砥平縣監), 첨지(첨지), 중추부사(中樞副事)의 요직(要직)을 거치시고 배위(配위)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의 사이에 3男 卽 長男 諱 도(渡) 次男 諱 준(濬) 三男 諱 섭(涉)은 3編으로 나누고 각각 甲編, 乙編, 丙編의 편조(編祖)로 모시며 특히 그 자손(子孫)들은 홍천(洪川)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각지(各地)로 분거(分居)하였다. 자손(子孫)들은 公을 7派 中 지평공파(砥平公派)의 파조(派祖)로 모신다. 墓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2 선영하(先塋下)에 모셔 저 있다.

판윤공 휘 숙(淑)

公은 세보상(世譜上) 17世이시며 선고(先考) 휘 찬(璨)과 선비 貞夫人 평산 신씨(平山 申氏)의 三男으로 1490年 5月 28日 出生하셨다.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는 선친(先親)의 유훈(遺訓)에도 불구(不具)하시고, 아우만은 관직(官職)에 나가게 하자는 두 형님(兄任)들의 권고(勸告)에 힘입어 일찍부터 학문(學文)에 정진(精進)하여 中宗 23년 실시(實施)한 과거(科擧)에서 진사과(進士科)에 급제(及第)하고 5年 後에는 문과(文科)에 합격(合格)하였다.
승정원(承政院) 권지박사(權知博士)에 오르고 중종(中宗) 31年에는 문신(文臣)들의 활쏘기 대회(大會)에서 1등을 하여 1계급 특진(特進)의 영예(榮譽)도 받았다. 승정원(承政院)의 여러 요직(要職)을 두루 거쳐 안산군수(안산군수), 성주목사(星州牧使)의 외직(外職)에 나가시어 가시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푸시니 명종(明宗)의 총애(寵愛)와 백성(百姓)들의 추앙(推仰)을 받으시었다.
경북 성주군에는 公의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진다. 황해감사 재임시(在任時)에도 선정(善政)을 베푸시니 道民들이 진정(陳情)을 하여 재임(再任)까지 하였다.

그 후로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한성부판윤, 동지중추부사를 역임(歷任)하셨으며 황해도 해주에는 공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건립(建立)되었으나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함경도 관찰사 부임(赴任)으로 그 곳에 남궁씨가 살게 되었다고 傳하여지고 있으나 확실(確實)한 자료(資料)를 아직까지 찾지 못하였다.
배위(配位)로는 貞夫人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나 무후(無後)하였고 貞夫人 고홍 류씨(高興 柳氏)는 長男 諱 제(悌)로 연안공파(延安公派)의 파조(派祖), 貞夫人 완산 이씨(完山 李氏) 슬하(膝下)에서는 次男 諱 회(恢)로 승지공파(承旨公派)의 파조(派祖)로 모신다. 후손(後孫)들은 諱 숙(淑)公을 4派 中 판윤공파(判尹公派)의 파조(派祖)로 모시고 있다. 墓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2 만세동 선영하(先塋下)에 모셔 저 있다.

연안공 휘 제(悌)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字는 중우(仲友) 호는 죽계(竹溪)이시다.公께서는 중종(中宗) 38年(1543)에 선비 貞夫人 고흥 유씨(高興 柳氏) 슬하(膝下)에서 출생(出生)하셨다. 약관 10歲에 선고(先考)의 喪을 當하였으나 좌절(挫折)하지 않으시고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학업(學業)에 더욱 정진(精進)하여 선조 원년(宣祖 元年)에 증광(增廣), 생진(生進)양시(兩試)에 등과(登科)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등용(登用)되었다. 그 後 평강군수(平江郡守)로 재임시(在任時)에는 어머니의 별세(別世)로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귀가(歸家)하여 3年 치상(致喪)을 치른 뒤, 진잠군수(鎭岑君守)에 임명(任命)되어 백성(百姓)을 아끼고 사랑하며 근검(勤儉)하고 백성(百姓)들에게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는 等 선정(善政)을 베푸시니 군민(郡民)들이 보은(報恩)의 뜻으로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이를 알게 된 선조(宣祖) 임금께서 거관근간부역평균(居官勤幹賦役平均)이란 여덟 글자를 써서 치하(致賀)하는 뜻으로 하사(下賜)하시는 영광(榮光)을 안았다. 이어 금천(金川), 백천(白川), 평산(平山), 연안군수(延安郡守)를 거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전조사(轉漕使)로 임명(任命)받아 군수물자(軍需物資)를 해로(海路)로 안전(安全)하게 수송(輸送)하니 王은 이를 또 포상(褒賞) 하였다
슬하(膝下)에는 숙부인(淑夫人) 풍천 임씨(豊川 任氏)와 함께 4男을 두시니 長男 휘 행은 甲編, 次男 휘 명은 乙編, 三男 휘 헌은 丙編, 四男 휘 협은 丁編의 編祖가 되셨다. 후손(後孫)들은 公을 7파중 연안공파(延安公派)의 파조(派祖)로 모신다. 墓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2 만세동 선영하(先塋下)에 모시었다.

승지공 휘 회(恢)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선고(先考) 휘 숙(淑 : 판윤공)의 차남(次男)으로 1546年에 출생(出生)하셨다. 字는 군곽(君廓)이시다. 일찌기 학문(學文)에 정진(精進)하여 경륜(經綸)이 높고, 또한 효행(孝行)이 남다르셨으나 관직(官職)에 나아가지를 아니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에서는 교관(敎官)을 命하고 또 금오랑(金吾郞)에 命하였으나 계속 수락(受諾)하지 않으시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강원도 홍천군 동면 원운리로 낙향(落鄕)하여 은둔(隱遁)하시며 후학지도(後學指導)에 전념(專念)하셨다. 後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에 증직(增職)되셨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행주 기씨(幸州 奇氏)로 슬하(膝下)에 3男을 두시니 長男은 휘 발로 甲編, 次男 휘 진은 乙編, 三男 휘 급은 丙編의 編祖가 되셨다. 후손(後孫)들은 公을 7파중 승지공(承旨公)파의 파조(派祖)로 모시고 있다.

습독공 휘 설(說)

公은 세보상(世譜上) 17世이시며 부제학공(副提學公) 諱 찬(璨)公의 4男으로 출생(出生)하셨다. 학문(學문)에 출중(出衆)하시어 세자(世子)의 습독(習讀)에 이르렀다. 슬하(膝下)에는 4男(長男 諱 언公, 次男 諱 륜(崙)公, 3男 諱 린公, 4男 諱 숭(崇)公)을 두었으나 4男 휘 숭(崇)公만이 계대(繼代)를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행(不幸)하게도 자세한 기록(記錄)은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후손(後孫)들은 公을 4派 中에서 습독공파(習讀公派)의 파조(派祖)로 부른다. 墓는 실전(失傳)한 관계(關係)로 서울 도봉구 도봉동 산 86-2 선영하(先塋下)에 단(壇)을 세워 묘(墓)를 대신(代身)하고 있다.

모현공 휘 숭(崇)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선고(先考) 諱 설(說)의 4男으로 출생(出生)하셨다. 위로 세분의 兄님들은 무후(無後)하시고, 유일(唯一)하게 계대(系代)를 이어 오고있다. 그 밖에 자세한 기록(記錄)이 전(傳)하여 지지 않으므로 병진보(丙辰譜)를 편찬(編纂)할 때 일부(一部)를 확인(確認)하여 파(派)로 독립(獨立)하게 되어 모현공파(慕賢公派)를 이루어 7派로 나뉘게 되었다.

후손(後孫)들은 公을 7派 中 모현공파(慕賢公派)의 파조(派祖)로 모신다. 배위(配위)와 산소가 전(傳)하여 지지 않는 관계(關系)로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2 선영하(先塋下)에 단(壇)을 세워 墓를 대신(代身)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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