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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이야기
족보의 의의

족보(族譜)는 성씨(姓氏)와 관련(關聯)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資料)의 하나로 시조(始祖) 부터 역대(歷代) 조상(祖上)의 얼과 우리나라의 역사(歷史)가 담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大部分)의 사람이 족보(族譜)에 실려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수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歷史冊)이다. 이에따라 옛날부터 족보(族譜)는 집안의 보물(寶物)처럼 소중(所重)히 간직하고 이를 對할때는 상위(上位)에 모셔놓고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절을 두번한 後에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祖上)을 대(對)하듯 하였으며 자신(自身)의 목숨 보다 중요(重要)하게 여겼다.

이처럼 소중(所重)하게 여겨온 족보(族譜)가 해방후(解放後)의 서양화(西洋化)와 지금의 핵가족(核家族) 제도(制度)가 되면서 봉건사상(封建思想)의 유물(遺物)로만 생각하고 도외시(度外視)하는 경향(傾向)이 일고 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 는 말에서, 또 지금도 '근본(根本)이 없는 사람' 으로 치부(置簿)되었을 때 그하나만으로도 치명적(致命的)인 약점(弱點)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祖上)들이 족보(族譜)를 왜 그렇게 소중(所重)히 여겼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족보(族譜)는 '피의 기록(記錄)이며 혈연(血緣)의 역사(歷史) 이다. 우리 조상(祖上)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켜온 족보(族譜)를 자랑스러운 전통(傳統)으로 이어가야 할 것이다.

족보의 역사

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세계(世界)에서 부러워 할 정도(程度)로 잘 발달(發達)된 족보(族譜)로 정평(定評)이 나 있으며, 계보학(系譜學)의 종주국(宗主國)으로 손 꼽힌다. 외국(外國)에도 '족보학회(族譜學會)'나, 심지어는 족보(族譜) 전문도서관(專門圖書館)이 있는 等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關心)이 많지만 우리나라처럼 各 가문(家門)마다 족보(族譜)를 문헌(文獻)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二千年) 가까이 기록(記錄) 해온 나라는 없다. 현재(現在)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의 계보학(系譜學) 자료실(資料室)에는 600여종 (六百餘種)에 13,000여卷의 족보(族譜)가 소장(所藏)되어 있다.

성씨(姓氏) 관계(關係)의 가장 중요(重要)한 자료(資料)라 할 수 있는 족보(族譜)는 원래(元來) 중국(中國)의 6조(六朝)시대에 시작(始作)되었는데 이는 왕실(王室)의 계통(系統)을 기록(記錄)한 것이었으며, 개인(個人)의 족보(族譜)를 갖게 된것은 한(漢) 나라때 관직등용(官職登用)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만들어 과거(科擧) 응시생(應試生)의 내력(來曆)과 조상(祖上)의 업적(業積) 등을 기록(記錄)한 것이 시초(始初)이다. 特히 중국(中國) 북송(北宋)의 문장가(文章家)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의해서 편찬(編纂)된 족보(族譜)는 그후 모든 족보(族譜)의 표본(標本)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고려왕실(高麗王室)의 계통(系統)을 기록(記錄)한 것으로 고려(高麗) 18대 王인 의종(의종 :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고려사(高麗史)』를 보면 고려(高麗) 때에도 양반 귀족(貴族)은 그 씨족계보(氏族系譜)를 기록(記錄)하는 것을 중요시(重要視)하였고, 제도적(制度的)으로 종부사(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譜牒)을 관장(管掌)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當時)의 귀족(貴族) 사이에는 계보(系譜)를 기록(記錄) 보존(保存)하는 일이 실제(實際)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사적(私籍)으로 간행(刊行)되기 시작(始作)하였으나, 1476年(朝鮮 成宗7年)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體系的)인 족보(族譜) 형태(形態)를 갖춘 최초(最初)의 족보(族譜)이다. 이후 1565年(朝鮮 明宗20年)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血族) 전부를 망라(網羅)하여 간행(刊行)되면서 이를 표본(標本)으로 하여 명문세족(名門勢族)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族譜)를 간행(刊行)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結果) 17세기(世紀) 이후(以後) 여러 가문(家門)으로부터 족보(族譜)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大部分)의 족보(族譜)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始作)했다.

조선(朝鮮) 초기(初期)에 간행(刊行)된 족보(族譜)의 대부분은 족보간행(族譜刊行)을 위해 초안(草案)을 하고 관계(關係) 자료(資料)를 충실(充實)히 보완(補完)한 뒤 간행(刊行)에 착수(着手)하여 내용(內容)에 하자(瑕疵)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以後)의 족보(族譜)들은 초안(草案)이나 관계 자료(關係 資料)의 검토(檢討)와 고증(考證)도 없이 자의적(自意的)으로 기록(記錄)하여 간행(刊行)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自意的)인 수식(修蝕)이 加하여 졌음은 물론(勿論)이며 조상(祖上)을 극단적(極端的)으로 미화(美化)하고, 선대(先代)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誇張)하거나 조작(造作)하고, 심지어 명문(名門) 집안의 족보(族譜)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境遇)도 있었다. 뿐만아니라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思想)에 젖어 시조(始祖)의 유래(由來)를 중국(中國)에 두어 기자(箕子 : 紀原前 1122年 우리나라에 왔다고 함)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거나, 중국(中國)의 인물(人物)을 아무런 고증(考證)도 없이 조상(祖上) 이라고 하는 式으로 족보(族譜)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 이유(理由)는 당시(當時) 중화사상(중화사상)에 물들은 일반적인 관념(觀念)에서 비롯된 것이며 족보(族譜)를 간행(刊行)함으로써 자신(自身)의 가문(家門)의 격(格)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야기(惹起)된 것이었다.

족보의 종류
1.대동보(大同譜)

같은 시조(始祖) 아래에 각각 다른 계파(系派)와 본관(本貫)을 가지고있는 씨족(氏族)을 함께 수록(收錄)하여 만든 족보책(族譜冊)이다.

2.족보(族譜), 종보(宗譜)

본관(本貫)을 단위(單位)로 같은 씨족(氏族)의 세계(世系)를 수록(收錄)한 족보책(族譜冊)으로, 한 가문(家門)의 역사(歷史)와 집안의 계통(係統)을 수록(收錄)한 책이다.

3.세보(世譜), 세지(世誌)

한 종파(宗派) 또는 그 이상(以上)이 같이 수록(收錄)되어 있거나, 한 종파(宗派)만 수록(收錄)된것을 말하며 동보(同譜), 합보(合譜)라고도 한다.

4.파보(派譜), 지보(支譜)

시조(始祖)로 부터 시작(始作)하여 한 종파(宗派)만의 이름과 벼슬, 업적(業積) 等을 수록(收錄)한 책이다. 이들 파보(派譜)에는 그 권수(券數)가 많아 종보(宗譜)를 능가(凌駕)하는 것도 적지 않다. 파보(派譜)는 시대(時代)가 변천(變遷)함에 따라 증가(增加)되어가고, 그 표제(標題)에 『OOO씨파보』, 『OOO씨 좌랑공파보』, 『OOO씨 함경파세보』 등과 같이 본관(本貫)과 성씨(姓氏) 외에 지파(枝派)의 중시조명(中始祖名) 또는 집성촌(集姓村), 세거지 지명을 붙이고 있으나, 내용(內容)과 형식(形式)에서는 족보(族譜)와 다를게없다.

5.가승보(家乘譜)

본인(本人)을 중심(中心)으로 수록(收錄)하되, 시조(始祖)로부터 자기(自己)의 윗대와 아랫대에 이르기까지의 이름과 업적(業積), 전설(傳說), 사적(事績)을 기록(記錄)한 책으로 족보(族譜) 편찬(編纂)의 기본(基本)이 된다.

6.계보(系譜)

한 가문(家門)의 혈통관계(血統關係)를 표시(標示)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系統的)으로 나타낸 도표(圖表)로서, 한 씨족(氏族) 전체(全體) 또는 한 부분(部分)만을 수록(收錄)한 것이다.

7.가보(家譜)와 가첩(家牒)

편찬(編纂)된 형태(形態), 내용(內容)에 상관(相關)없이 동족(同族) 전부(全部)에 걸친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가(一家)의 직계(直系)에 한하여 발췌(拔萃)한 세계표(世系表)를 가리킨다.

8.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국내 모든 성씨(姓氏)의 족보(族譜)에서 큰줄기를 추려내어 모아놓은 책으로 모든 족보(族譜)의 사전(辭典) 구실(口實)을 하는 것이다. 『청구씨보(靑丘氏譜)』, 『잠영보(簪纓譜)』,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9.기타

『문보(文譜)』, 『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 『진신오세보(縉紳五世譜)』, 『호보(號譜)』와 같이 현달한 조상의 세계(世系)를 명백(明白)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나 『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錄)』, 『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 등과 같이 조상중(祖上中)에서 충(忠), 효(孝), 절(絶), 의(義)가 특히 뛰어난 사적과 공훈(功勳)을 수록한 것도 있다. 또한, 환관(宦官 : 내시) 사이에도 계보(系譜)를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이 다른 자손(子孫)을 입양(入養)시켜 자손으로 삼고 가계(家系)를 보존(保存)하고 있는 양세계보(養世系譜) 등도 있다.

족보의 술어 해설
1. 시조(始祖)와 비조(鼻祖)

시조(始祖)는 첫번째 조상(祖上)이며 비조(鼻祖)는 시조 이전(以前)의 선계(先系) 조상(祖上) 中 가장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
또 시조(始祖) 이전(以前)의 계대(系代)가 없을 경우(境遇)에는 시조(始祖)를 정중(정중)하게 표현(表現)하기 위하여 비조(鼻祖)라고도 한다

2. 중시조 (中始祖)

시조(始祖) 이하(以下)의 대에서 쇠퇴(衰退)하였던 가문(家門)을 다시 일으킨 조상(祖上)을 일컫는 말

3. 선계(先系)

시조(始祖) 또는 중시조(中始祖) 이전(以前)의 조상(祖上)을 일컫는 말

4. 세계(世系)

시조(始祖)로부터 대대(代代)로 이어가는 계통(系統)을 차례로 말하는 것

5. 세(世)와 대(代)

시조(始祖)를 1世로 하여 차례로 셀 때 世를 붙이고, 자기(自己)를 빼고 조상(祖上)들을 차례로 셀 때 代를 붙인다

6. 선대(先代)와 말손(末孫)

조상(祖上)의 여러 代를 일컫는 말이 선대(先代)이고 이에 반(反)하여 아래 代의 자손(子孫)들을 후대(後代) 또는 말손(末孫)이라고 한다

7. 이름의 종류

조상(祖上) 어른의 이름을 돌아가신 분은 휘(諱) 살아계신 분은 함자(銜字)라고 한다. 아명(兒名)은 아이 때 지어 부르던 이름을 말하며 자(字)는 관례(冠禮 : 成年式)을 치르고 지은 이름으로 관명(冠名)이라고도 한다. 항렬(行列)에 따라 족보(族譜)에 올리는 이름을 항명(行名)이라 하고 부르던 이름 외에 따로 지은 이름 卽 本 이름이나 字 外에 허물없이 부르거나 쓰기 위해 지은 이름은 별호(別號), 호적(戶籍)에 올린 이름은 호명(戶名)이라 한다.

8. 항렬(行列)

이름을 지을 때 代 數에 따라 쓰는 돌림字를 항렬(行列)이라고 한다.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 또는 오행(五行)을 따르기도 한다.

성씨의 연원

우리나라 성씨(姓氏)는 대개 중국(中國)의 성씨제도(姓氏制度)를 모방(模傍)한 것이기 때문에 먼저 중국성씨(中國姓氏)의 연원(淵源)을 알아보아야 한다. 중국(中國)의 성씨(姓氏)는 그 역사(歷史)가 요원(遼遠)하여 처음 문자(文字)로 성(姓)을 사용(使用)하기 시작(始作)한 것은 요순제왕(堯舜帝王)이 그 위엄(威嚴)을 보이기 위해 사용(使用)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처음은 왕가(王家)에서만 써 오던 성씨제도(姓氏制度)가 그 후 공신(功臣)에게 사성(賜姓-왕이 성을 내림)함으로써 귀족(貴族), 벼슬아치, 양반(兩班)등으로 점차 확대(確大)되어 수.당 시대(時代)에는 서민(庶民)들까지 널리 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대륙(大陸)의 영향(影向)을 받은 우리나라는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에 왕족(王族)에 限하여 성씨(姓氏)를 사용(使用)하기 시작(始作)하였을 뿐이다. 그 後 삼국(三國 : 신라,고구려,백제)시대(時代)부터 사성(賜姓)을 내려 귀족(貴族)과 족장(族長)들도 성을 갖게 되었다.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 주몽(朱蒙)은 고(高)를 자기 성씨(성씨)로 定하고 건국(建國)의 공신(功臣)인 재사(再思)에게 극(克)씨를, 무골(武骨)에게 중실(仲室)씨를, 묵거(默居)에게 산실(山室)씨를 각각 사성(賜姓)하여 사회적(社會的) 지위(지위)를 보장(保張)해 주기도 하였다. 신라(新羅)도 고구려(高句麗)와 마찬가지로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는 나무껍질 박자 朴을 자기 성(성)으로 定하고 건국공신(建國功臣) 육촌장(六村長)에게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의 성(姓)을 각각 하사(下賜)하였다.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온조(溫祚)는 고구려(高句麗) 고주몽(高朱蒙)의 왕자(王子)였으나 그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새로운 姓을 만들어 부여(扶餘)씨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래(由來)를 밟아 토착(土着)된 우리나라의 여러 성씨(姓氏)는 고려시대(高麗時代)로부터 민간(民間)에게까지 널리 퍼져 姓을 갖게 되었으나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성(賜姓) 이외엔 姓을 쓸 수 없었고 그 시대(時代)에는 성씨(姓氏)만 가지고도 행세(行勢)를 할 수 있었으나 고려조(高麗朝)에 와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빛나는 가문(家門)을 가진 성씨(姓氏)들은 자기(自己) 姓이 타성(他姓)과 혼돈(混沌)되는 것을 避하고 만대(萬代)에 그 체통(體統)을 유지(唯지)하기 위하여 그 씨족(氏族)의 역사(歷史)를 기록(記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족보(族譜)의 유래(由來)라 한다. 족보제도(族譜制度)가 시작(始作)된 後 혹자(或者)는 자기 족보(族譜)의 약세(弱勢)를 숨기려고 엉뚱한 중국(中國)의 명현(名賢)을 끌어넣어 자기 시조(始祖)라고 과장(誇張)하기도 했다

간혹(間或) 중국(中國)사람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귀화(歸化)한 씨족(氏族)도 있기는 하나 다수(多數)의 성씨(姓氏)는 외성(外姓)과는 관계(關係)없이 우리나라 토착(土着)의 성씨(姓氏)들이다.

우리 성씨(姓氏)의 구성(構成)은 동성(同姓)가운데에 여러 본(本)으로 나누어져 있다. 本은 조상(祖上)을 하나로하는 혈통(血統)을 뜻하는 것으로 동성(同姓)일지라도 본관(本貫)이 다를 시(時)는 타성(他姓)과 동일시(同一時)하는 것이 특징(特徵)이라 하겠다. 이 본관(本貫)의 중요성(重要性)은 민간풍속(民間風俗)에 큰 영향(影響)을 끼치는 관습(慣習)이다. 동성동본(同姓同本)은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 하여 절대(絶對) 혼인(婚姻)을 할 수 없는 금혼제도(禁婚制度)는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부터 국법(國法)으로 傳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이 중요성(重要性)을 지닌 자연인(自然人)의 姓과 그 본관(本貫)의 數는 과연(果然) 얼마나 될까? 여러가지 고서(古書)를 보면 고려조(高麗朝)에는 기록(記錄)이 없고 조선시대(朝鮮時代) 이후(以後)로만 기록(記錄)이 있는데 초기(初期)에는 엄청나게 그 數가 많았다가 차차 정리(整理) 감축(減縮)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보면 조선초(朝鮮初)에는 무려 4,296姓 이나 되던 성씨(姓氏)가 임.병양란(壬.丙兩亂)을 겪은 後에는 298姓으로 현저(顯著)하게 줄어들었으며 왜정(倭政)을 거쳐 8.15광복(光復) 後 다시 정리(整理)되어 1975年 10月 1日자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 발표(發表)에 따르면 한국성씨(韓國姓氏)는 249姓이 현존(現存)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2000年 11月1日 현재(現在) 한국성씨(韓國姓氏)는 286個, 본관(本貫)은 4,179個로 조사(調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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