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열남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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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전 인물
兵使公

이 단은 조선조 좌명원종공신 자헌대부 한성부윤 충청전라병마도절제사 남궁계(啓)를 추모 제향하는 단이다.

남궁계(啓)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이며 소부윤(少府尹) 우(祐)의 아들로 조선조에 음보로 등용되어 사과를 지내고 1401년(태종 1) 좌명원종공신 3등이 되었다. 1431년에 대호군에 올랐고 1426년(세종 8) 정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판의주목사가 되고 1435년 동지중추원사에 올랐다. 다음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38년 한성부윤에 오르고 1443년 전라도절제사 1445년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1446년(세종 28)에 세상을 떠나니 세종께서 크게 애통하여 승지를 보내 문상하고 예관을 보내 상수를 내려 호상케 하였다. 배는 정부인 능성구씨로 후사가 없어 남궁좌(佐)의 셋째 아들인 치(致)를 입양하여 대를 이었다.

묘가 실전되어 제를 드리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자손들이 정성을 모아 1962년 10월 15일에 단을 만들어 높은 은덕을 영원토록 기리게 되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하고 있다.

杆城公

이 묘는 사온서승(司署丞)을 거쳐 지간성군사(知杆城郡事)를 역임한 남궁좌(佐)와 배(配)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유택이다.

남궁좌는 시조 원청(元淸)의 13세손으로 고조 신(信)은 고려국자감 진사로 충숙왕조에서 벽상1등공신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고, 증조 진(瑨)은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이고, 조부 기(起)는 민부상서(民部尙書) 집현전제학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복(福)은 사복시판사(司僕侍判事)이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가 사온서승을 거쳐 지간성군사를 지냈고 정(政)·효(效)·치(致) 3남을 두었는데 10촌 병사공 계(啓)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셋째 치(致)를 입양계승하여 그 손이 번성하니 오늘의 함열남궁씨를 이룩하였다.

불행하게도 장남 정(政)이 무자하고 차남 효(效)도 6대손에서 절손되었으므로 시묘봉양(侍墓奉養)치 못하게 되어 출계 후손이 정성껏 봉제 수호를 하고 있다. 묘는 쌍봉으로 해좌에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博川公

이 묘(墓)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천군수(博川郡守)를 역임하고 병조참의(兵曹議)에 증직된 남궁치(致)의 유택이다.

남궁치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시조 원청(元淸)의 14세손으로 간성군사 좌(佐)의 셋째 아들이나 태종때 좌명원종 공신에 책록되고 대호군에 올랐으며 전라도절제사를 지내고 중추원부사에 이른 계(啓)에게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박천군수에 올랐다. 중종반정으로 손자인 찬(璨)이 복권될 때 같이 통정대부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옥천김씨(沃川金氏)이며 사향(巳向)으로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이조참판 순(順)을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判公

이 묘는 이조참판(吏曹判)에 증직된 남궁순(順)과 배(配) 증 정부인(貞夫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순은 시조 원청(元淸)의 15세손이며 군수(郡守) 치(致)의 아들로 세종조에 출생하여 사마시에 급제하고 예부생원(禮部生員)으로 청렴 결백한 선비로 고고하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 남궁찬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복권되어 증직을 받을 때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배 철원최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직되었다. 특히 정부인 최씨는 청빈한 가문을 지키며 유복자 찬(璨)을 정성으로 가르쳐 강직한 공인으로 바르게 살게 하였으며 남궁씨(南宮氏) 문중을 중흥시키는 중조로서 자손들의 존경을 받게 하였다. 부인은 높은 벼슬로 출세하는 것보다 자손이 번성하기를 염원하더니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켜 외아들 찬(璨)이 4남을 두어 대를 이어 번성하게되니 오늘의 남궁(南宮)씨는 단본이며 모두 한 자손이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副提學公

이 묘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호은(壺隱) 남궁찬(璨)의 유택이다. 남궁찬은 자가 숙헌(叔獻) 호는 호은(壺隱)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증 이조참판 순(順)의 아들로 1453년(단종 1)에 출생했다.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경상도 도사·제주목사·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종직(金宗直) 등 제현을 신구하려는 상소를 극간했다가 용안에 유배되고 1504년(연산 10)에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종반정 후에 신원되었고 이조판서·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에 어울리게 삼사사관(三司四館)에서 국사에 임하였고 후손들은 청족(淸族)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맑은 그 삶을 본으로 하고 있다. 유배길에 지은 묵죽(墨竹)과 묵매(墨梅)의 시서는 대가를 이루었다.

왕명으로 오늘의 자리에 안장되었고 묘전의 문관석은 크기가 웅장하고 모양이 특이한데 그의 충의심에 감격한 명의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명나라에서 제작하여 왔다고 전한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재 격이다. 배 정부인 안동김씨는 무후하고 계배 정부인 평산신씨에게 4남을 두었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副提學公 神道碑

이 비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오위도총관·행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한 남궁찬의 신도비이다.

이 비는 1957년 9월 국가에 남긴 공적과 충절의 정신을 길이 계승하기 위하여 후손들의 정성으로 건립하였다.

남궁찬(璨)은 시조 원청(元淸)의 16세손이며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중시조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빈하여 나라에는 충(忠)으로, 부모에게는 효(孝)로, 정사에는 의(義)로 임하였다.

호는 호은(壺隱)이고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의 여러 벼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전북 익산의 용안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필(弼)·익(翼)·숙(淑)·열(說)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관직을 역임하며 가맥을 계승하여 가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副提學公 貞夫人

평산 신씨

세보(世譜) 16세 부제학공(副提學公)의 배위(配位)이시다.

1457년(세조 3) 2월 27일에 출생하셨으며 아버지는 대사성(大司成) 자승(自繩)이시고 할아버지는 한림대제학(翰林大提學) 개( )이시며 외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시다.

슬하에 4남 필(弼), 익(翼), 숙(淑), 열(說)과 2녀를 두셨는데 장남 필(弼)은 고창현감(高敞縣監), 차남 익(翼)은 임피현령(臨陂縣令), 3남 숙(淑)은 한성판윤(韓城判尹), 4남 열(說)은 습독관(習讀官)으로 모두가 관직을 역임하며 가맥을 계승하여 가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高敞公

이 묘는 조선 때 현감을 지낸 남궁필(弼)과 배 숙인(淑人) 강화최씨(江華崔氏)·배 숙인(淑人) 철원최씨(鐵原崔氏)의 유택이다.

남궁필은 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의 17세손이자 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된 찬(璨)의 장남으로 1475년(성종 6)에 출생했다.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아버지 남궁찬이 연산군의 폭정을 상소하다가 익산시 용안(龍安)으로 유배되니 그 뒤를 따라가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인한 병이라 치유되지 못하고 상을 당하니 애통·비감해 하며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그 뒤로는 스스로 산수주인(山水主人)이라 칭하며 예·악을 즐기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중종반정으로 부친이 사면되면서 고창현감의 관직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가숙제의도(家塾祭儀圖)』가 있다. 묘는 강화최씨와 합봉하였고 철원최씨는 왼쪽에 쌍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향사를 지낸다.

懸令公

이 묘는 통훈대부 임피현령을 역임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判)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된 남궁익(翼)과 배위 정부인 연안김씨의 유택이다. 남궁익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으로 부제학 찬(瓚)의 둘째 아들이며 1480년(성종11)에 출생하였고 호는 익지(翼之),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선친의 유언에 따라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40세에 음보로 관직에 나가 한성부 랑관, 수운판관, 동복현감, 임피현령을 지냈으며 부친 찬(瓚)이 중종반정으로 사면 증직될 때 그도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슬하에는 교리 희(憘), 자헌대부 한성판윤 침(沈), 지평현감 기(愷)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6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判尹公

이 묘는 한성판윤과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남궁숙(淑)과 배 정부인 완산이씨와 계배 정부인 고흥류씨와 삼합봉(三合封)이다.

남궁숙은 시조 원청(元淸)의 17세손이자 부제학 남궁찬(璨)의 셋째 아들로 1490년(성종 21)에 출생했다. 자는 숙부(淑夫), 본관은 함열로 선친의 억울한 죽음에 비분절통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형인 필(弼)과 익(翼)의 권유를 받아 1528년(중종 23) 뒤늦게 생원이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안산군수·성주목사에 이어 홍문관부정자·지평(持平)·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상호군(上護軍)·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한성부우윤·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동지 중추부사에 올랐다.

안산군수·성주목사 재임시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생활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슬하에는 연안부사 제(悌)와 승지 회(恢)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6일 후손들이 추모 향사를 지낸다.

判尹公 神道碑

이 신도비는 정헌대부 한성판윤을 역임한 남궁숙(淑)의 신도비이다. 남궁숙(淑)은 자가 숙부(叔夫)이고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부제학 남궁찬(璨)의 아들로 1528년(중종 23)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박사에 초임되고 1536년 홍문관 부정자에 이어 지평·사간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 좌부승지가 되었다.

황해도·전라도·함경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정헌대부,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이 일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영을 위로하는 뜻으로 성심을 모아 1982년 비를 세웠다.

매년 음력 10월 16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判尹公 善政碑

이 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남궁숙(淑)의 선정비로 고을 백성 등을 위해 많은 치적선정을 하여 1547년(명종 2)에 건립하였다.

남궁숙(淑)은 자는 숙부(淑夫)이며 강원도관찰사 남궁찬(璨)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 23)에 생원(生員)이 되고 다음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박사에 임명되고 1536년(중종 31)에 홍문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지평(持平)·사간(司諫)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그 후 상호군(上護軍)과 황해도관찰사, 1550년(명종 5)에 전라도관찰사, 다음해에 한성부윤이 되고 1552년 (명종 7)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불취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전직되었다.

그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재직시 백성을 다스리며 실천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첫째, 옛 폐단을 고쳐 정사를 새롭게 하고 둘째,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낭비를 없애고 절약하였으며 셋째, 백성을 사랑하고 송사는 명철하게 판단처리 하였다.

그가 1546년(명종 원년)에 병을 얻어 이임하니 그에 대한 고을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담아 비를 세웠다. 비문 끝절에 "공경하도다 공이여 우리 향토에 사랑을 주시었도다. 우리는 돌에 글로 새겨 영세토록 잊지 않으려고 명종 2년 정월에 이 비를 세우노라"고 기록하였다.

判尹公 貞夫人

완산 이씨

세보(世譜) 17世 판윤공 휘 숙(諱淑)의 배위(配位)로서 승지공 휘 회(諱恢)의 생모(生母)이시다.

묘소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월운리에 있었는데 1979년(기미년) 3월 현위치 (도봉산 만세동 판윤공 묘전)에 이장(移葬)하여 모셨다.

習讀公

세보(世譜) 17세 부제학공(副提學公)의 4자(四子)이시다.

공께서는 일찍이 학문이 높고 중국어에 능통하시어 사역원(司譯院: 외국어의 번역과 통역을 맡아 보던 관청)의 습독관(習讀官)으로 재직하셨다.

공은 슬하에 언(言), 윤(崙), 인( ), 숭(崇)의 4형제를 두셨으나 막내이신 휘숭(諱崇)만이 대를 이어 오셨으며 이분이 모현공파(慕賢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공의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서울 도봉구 도봉동 만세곡(萬世谷) 선영국 내에 단비(壇碑)를 모셔 치제(致祭) 하고 있다.

奉公

이 묘(墓)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참봉공파조( 奉公派祖)인 진사 남궁후(厚)와 배위 공인전의이씨(恭人全義李氏)의 유택이다. 남궁후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고창공(高敞公) 남궁필(弼)의 둘째 아들로 1502년(연산군 8)에 출생하였으며 함열남궁씨의 7파조 중 참봉공파조이다.

한때 진사의 직에 나갔으나 관직이 없고 오로지 학문을 숭상하고 즐기며 후진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참봉의 직을 내렸으나 끝내 하지 않았으며 다만 고고한 선비로 살다가 향년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배위는 전의이씨이며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통덕랑 저(著), 차남은 경상도 도사·사성 지(芷), 삼남은 참봉을 지낸 무(茂)이다. 매년 음력 10월 16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校理公

이 묘(墓)는 조선조때 교리(校理)를 역임한 남궁희(憘)와 배위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를 합봉한 유택이다.

남궁희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자 현령 남궁익(南宮翼)의 장남으로 1510년(중종 5)에 출생했다. 자는 구중(懼仲)이며 함열남궁씨 7파조 중 교리공파조(校理公派祖)이다.

30세에 초시를 거쳐 진사(進士)에 오르고 3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 예문관검열, 대교, 홍문관 수찬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은퇴하고 1595년(선조 30)에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배는 숙부인(淑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청풍군수 활(活)을 두었다. 묘는 선고(先考)의 묘 아래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16에 후손들이 모여서 추모 향사를 지낸다.

大司成公

이 묘는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한 남궁침( )과 배위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유택이다. 남궁침은 자가 성중(誠仲)이며 본관은 함열(咸悅)로 1513(중종 8)에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으로 관찰사 찬(璨)의 손자이며 현령 익(翼)의 차남으로 출생 대사성공파의 파조이다.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고 1544년(중종 39)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춘추관 기사관으로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48년(명종 3) 이조좌랑, 다음해 사인이 되고 1552년 경상도 암행어사·직제학·우부승지, 다음해에 좌승지를 지내고, 1557년(명종 12)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 후 판결사(判決事),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564년 전라도 관찰사·형조참판·함경도 관찰사, 1566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슬하에는 직장 길( ), 영광군수 견( ),직장 식(湜), 건( ), 가선대부 도지중추부사 영(泳) 등 5형제를 두었다. 묘는 정부인(貞夫人) 양천허씨와 합봉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16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砥平公

이 묘는 통훈대부 지평현감을 역임한 남궁기(愷)와 배 숙인(淑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유택이다.

남궁기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현령공(縣令公) 남궁익(南宮翼)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낙중(樂仲), 본관은 함열(咸悅)이다.

1517년(중종 12)에 출생했고, 함열남궁씨 7파조 중 지평공파조(砥平公派祖)이다. 23세때 과거에 등과하여 생원 진사에 오르고 여러 벼슬을 거쳐 지평현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인 전주이씨이며 슬하에 통덕랑 도(渡), 예부생원 준(濬), 무관 만호 판관 섭(涉)의 3형제를 두었다.

묘는 합봉으로 모셨다. 매년 음력 10월 16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延安公

이 묘는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김천군수·배천군수·연안부사를 역임한 죽계(竹溪) 남궁제(梯)와 배 숙부인(淑夫人)풍천임씨(豊川任氏)의 유택이다. 남궁제는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 숙(淑)의 아들로 1543년(중종 38)에 출생했다. 자는 중우(仲友), 호는 죽계(竹溪), 본관은 함열이다. 함열남궁씨의 7파조중 연안공파조(延安公派祖)이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 급제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1572(선조 5) 평강현령, 진감현감, 의령어사를 지내는 동안 치적이 있어 왕으로부터 "거관근검부역평균(居官勤儉賦役平均)"이라는 여덟자를 포상받았다. 그 후 사섬시정을 거쳐 김천·백천군수, 평산·연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전조사(轉漕使)로서 군수물자 수송에 공을 세웠다.

슬하에는 장남 계공랑 행(荇) 차남 사무음사 명(蓂), 3남 함경순변사 헌(憲),4남은 주부 협(莢)을 두고 묘는 합봉하였다. 매년 음력10월 16일에 추모 향사를 지낸다.

承旨公

이 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된 남궁회(恢)의 유택이다.

남궁회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의 시조 원청(元淸)의 18세손이며 판윤(判尹)숙(淑)의 아들로 1546년(명종 1)에 출생하였다. 자는 군곽(君廓)이며 8세에 선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관직에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학문연마에만 전념하였고 효심 또한 극진하였다.

높은 경륜과 덕망을 인정받아 교관에 임명하였으나 수락하지 않았고 다시 금오랑(金吾郞)에 명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어머님을 모시고 강원도 홍천군 월운으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사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행주기씨(幸州奇氏)이며 묘는 합봉하였다.

슬하에는 발(發), 진(盡), 급( )의 3형제를 두었다.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추모향사를 지낸다.

慕賢公

세보(世譜) 18세. 호(號)가 모현재(慕賢齋)로 습독공(習讀公)의 4자(四子)로 태어나셨으며 모현공파(慕賢公派)의 파조이시다.

위로 세 분의 형님이 계셨으나 모두 후손이 끊어지고 공만이 습독공의 후사(后嗣)를 이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크게 번창하였다.

1975년 병진대보(丙辰大譜) 수보(修譜) 때 처음으로 공의 후손을 모현공파로 분리하여 공이 파조(派祖)가 되셨으며 우리 남궁씨(南宮氏)는 6파에서 7파로 늘어났다.

공의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만세곡(萬世谷) 선영국 내에 단비(壇碑)를 모셔 치제(致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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